이근민, 환각을 예술로 씻어내다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근민 작가의 개인전 '장면이 되기 전'이 파격적인 시각 언어로 관람객들에게 강렬한 전율을 선사하고 있다.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운 높이 3m의 대작들을 포함한 신작 23점은 혈흔과 장기, 살점 등을 연상케 하는 붉은 형상들로 가득하다. 25년 전 경계성 인격장애 진단을 받았던 작가는 당시 겪었던 환각 증세를 작업의 원천으로 삼아, 누구나 몸속에 지니고 있지만 외면하고 싶어 하는 원초적인 풍경을 화면 위로 가감 없이 끌어올렸다.작가는 자신의 환각이 의학적으로는 '병증'으로 규정되었으나, 캔버스 위로 옮겨지는 순간 예술이라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고 믿는다. 전시 제목인 '장면'은 어떤 상태를 고정된 틀로 규정짓는 사회적 시선을 의미하는데, 작가는 이러한 규정이 내려지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상태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문명사회가 효율성을 위해 분류해 놓은 질병 코드가 인간 본연의 다양성을 재단하는 방식에 대한 예술적 저항이자, 배제된 감각들을 다시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환각을 예술의 모티프로 삼았던 일본의 거장 구사마 야요이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근민의 회화는 보다 직접적이고 육체적인 에너지를 내뿜는다.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작가가 사회 시스템에서 소외되었던 개인의 고통을 과감하게 시각화함으로써 관람객들에게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고 분석했다. 고통의 기억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을 통해, 기괴하게 느껴졌던 화면은 어느새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과 따스함으로 치환되는 기묘한 힘을 발휘한다.
작가의 행보는 이미 글로벌 미술계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22년 국내 개인전으로 호평받은 이후 미국과 독일 등 해외 무대에서 연이어 전시를 개최하며 입지를 다져왔다. 특히 올해 초 홍콩에서 열린 세계적인 아트페어에서는 한국 미술의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글로벌 컬렉터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국제적 명성에 걸맞게 한층 성숙해진 연출력과 깊어진 철학적 사유를 보여주는 미공개 신작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과거의 작업이 검붉은 색채에 집중되었다면, 이번 신작들은 보랏빛과 연녹색, 푸른빛 등 다채로운 색감을 활용해 시각적 스펙트럼을 넓혔다. '정신과 의사의 머리'나 '연결된 몸'과 같은 작품들은 기괴한 형상 속에서도 정제된 미학적 질서를 보여주며 작가의 연출력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증명한다. 이제 작가에게 환각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과거의 기억일 뿐이지만, 그는 이성을 유지한 채 세포가 분열하듯 무작위로 형상을 구성하며 과거의 자신을 관찰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이근민의 회화는 낯설고 불편한 첫인상을 넘어,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작가가 직면하고 해결해 온 감각의 여정은 관람객들에게도 고통이 어떻게 예술로 승화될 수 있는지를 몸소 체험하게 한다. 회화라는 심연의 세계를 탐구하며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그의 전시는 다음 달 25일까지 무료로 진행되며, 한국 현대미술의 역동적인 변화를 확인하려는 발길이 당분간 삼청동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