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아비뇽서 연극으로 재탄생
한국 현대사의 아픈 손가락인 제주 4·3의 비극을 다룬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가 세계 최고의 연극 무대인 프랑스 아비뇽에서 화려하게 피어났다. 현지 시각으로 14일 저녁, 제80회 아비뇽 페스티벌이 열리는 카름 수도원 회랑 무대에는 이탈리아 극단 INDEX가 재해석한 동명의 연극이 올랐다. 유서 깊은 수도원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펼쳐진 이번 공연은 한국의 특수한 역사를 인류 보편적인 슬픔과 연대의 서사로 승화시키며 현지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한강의 문학 세계에 매료된 유럽 예술가들이 빚어낸 이번 무대는 문학과 연극의 경계를 허무는 강렬한 예술적 경험을 제공했다.이번 작품의 연출과 출연을 동시에 맡은 다리아 데플로리안은 앞서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연극화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전작이 주인공 영혜의 깊은 고독에 집중했다면, 이번 '작별하지 않는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에 관한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데플로리안 연출가는 주인공들이 함께함으로써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개인의 고립을 넘어 우정과 가족의 역사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가 이번 연극의 핵심이며, 이는 세상의 폭력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작품은 소설가 경하가 사고를 당한 친구 인선을 대신해 제주도 집을 찾아가며 시작된다. 그곳에서 경하는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 평생 가슴에 묻어온 가족의 상처와 역사의 기억을 마주하게 된다. 세 여성의 기억과 시선을 통해 제주 4·3의 비극을 더듬어가는 과정은 무대 위에서 시적인 언어와 몸짓으로 재구성되었다. 낯선 한국 현대사를 체득하기 위해 연출진은 직접 제주 4·3 평화공원을 방문하는 열의를 보였다. 희생자 추모관에서 보낸 긴 시간과 제주의 바다 풍경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한강의 문장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데플로리안 연출가는 한강 작가가 사적인 폭력과 국가적 폭력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두 층위를 절묘하게 섞어내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서사 능력과 시적인 질감을 유지하는 언어의 힘이 자신을 한강의 팬으로 만들었다는 고백이다. 연극은 제주 4·3이라는 강렬한 슬픔 속에서도 언제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여정'을 그려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비극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인 인류의 어리석은 폭력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확장되었다.

배우 모니카 피세두 역시 한강의 메시지에 깊은 공감을 표하며 예술의 역할을 역설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현대사의 비극 앞에서 연극의 무력함을 느꼈던 순간을 회상하며, 역사가 반복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꼬집었다. 권력을 쥔 이들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폭력에 맞서 예술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신념이 이번 무대에 투영되었다. 한강 작가 또한 지난 12일 열린 '작가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작품이 한국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반복해서 저지르는 폭력에 대한 보편적인 이야기임을 강조한 바 있다.
아비뇽의 밤을 수놓은 이번 공연은 한국 문학이 지닌 세계적인 위상과 예술적 보편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낯선 이국의 언어로 전달되는 제주의 아픔은 국경을 넘어 인간 존엄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다. 한강의 시적인 문체와 이탈리아 극단의 감각적인 연출이 만난 이번 연극은 페스티벌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될 전망이다. 폭력의 역사에 작별을 고하지 않고 끝까지 기억하겠다는 의지는 무대 위의 배우들과 객석의 관객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이번 공연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세계인의 공통된 기억으로 자리 잡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했다.














